SeMA 2006

Selected eMerging Artists展

2006_0913 ▶ 2006_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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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ed eMerging Artists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서울 중구 서소문동 37번지
Tel. 02_2124_8800
www.seoulmoa.org






떠오르는 작가들의 시각을 통해 동시대의 사회 문화적 이슈를 점검해보고 이를 쟁점화시켜 우리 미술문화의 발전을 조망해보자는 취지로 2004년 시작된 SeMA展이 올해로 2회째를 맞는다. 젊은 작가들의 활동이 어느 때보다도 두드러지고, 미술의 다변화 속에서 정체성 논의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현 시점에서 진정한 우리사회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어오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는 SeMA展은 우리시대의 사회, 문화적 현상을 직시하고, 그 핵심 키워드를 찾아내어 문화적 현상을 담아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시각들이 모여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직시하고 논의하고자 취지로 시작된 전시이다. ‘SeMA 2004 - 6개의 이야기’展에 이어, SeMA 2006展에서는 ‘도시의 이방인’이라는 커다란 주제 안에 ‘정글 선샤인 Jungle Sunshine’, ‘아스팔트 키드 Asphalt Kid’, ‘무명씨들의 대화 An Anonym’, ‘멀미 Nausea’, ‘일탈 Deviation - 꿈꾸는 사물들’, ‘내러티브 스피킹 Narrative Speaking’ 등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이번에 보여지는 6개의 섹션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 안에서의 모습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 도시의 형태, 화려하고 발전지향적인 긍적적 미래보다는 그 이면에 보이는 현상들에 주목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 몸담고 살아가지만, 결코 그곳을 벗어날 수 없고, 그럼으로써 갖게 되는 - 특히 젊은이들의 내면에 깔린 - 불안감, 고독, 다른 세계로의 이탈, 혹은 회상, 또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이 갖게 되는 도시적 감수성, 그리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어느 광고 문구처럼 도시에서 갖게 되는 여러 감정들에 대한 자기치유를 시도하는 휴먼 드라마적 내용 등으로 보여진다.





정글 선샤인
기획_임근혜 / 참여작가_고영미_박은선_이연미_이주연_최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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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미_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Ⅱ_한지에 채색, 오브제_120×18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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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선_충성 Loyalty_합성수지에 유채_27×21×21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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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미_피 묻은 징검다리_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색연필_112.1×191.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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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_페이퍼 맨_판화(리노컷)_가변설치

오후 1:37 200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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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경_핑크정글_실크스크린에 유화_193×193cm_2005


작가이자 사회인으로서 사회화의 초급 과정을 겪고 있는 7080 세대 작가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약육강식의 잔인한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이다. 살아남고자 버둥거리는 연약한 그들에게 교과서에서 배운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은 정글의 법칙(또는 사회적 덕목)을 배우도록 강요한다.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자신을 감출 것, 화려한 색채와 강렬한 향기로 상대를 현혹할 것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과 사나운 이빨로 잽싸게 급소를 공격할 것. 역설적이게도 《정글 선샤인》이 그리고 있는 사회적 풍경과 본연의 자아와 거리가 먼 사회적 페르소나를 갖추며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은 무덤덤하다 못해 오히려 밝고 명랑할 지경이다. 그들은 사회화 과정에서 겪는 배신, 분노, 좌절의 감정을 오히려 화려하고 가벼운 형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고 자기 치유를 시도한다. 무방비 상태로 벌거벗은 채 집중 폭격을 받고 있는 나약한 여인, 어두운 이면을 감추고 화사하고 유혹적인 일면만을 강조한 도시의 건물, 자신의 눈물에 젖어서 녹아버릴까 울지도 못하는 수많은 군중 속의 외톨이들, 이기심과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길한 눈빛을 번득이는 상상 동물들 그리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에 어쩔 도리 없이 복종하는 무기력한 개인의 모습은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현재 진행형의 휴먼드라마이다. 그러나 어느새 슬쩍 끼어들고 싶을 정도로 진하게 공감이 가는 이들의 대화는 비장하지도 처절하지도 않다. 정글의 맹수를 살짝 잠재우는 나른한 정오의 선샤인! ‘유머’야말로 타인에게 아픔을 전가하지 않으면서 고통을 소통할 수 있는 화법임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스팔트 키드-도시 속의 판타지(The Fantasy in the city)...
기획_오현미 / 참여작가_권순학_김정주_양재광_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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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학_Seoul Ring Expressway_디지털 프린트_100×199.5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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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주_The City_스테플, 사진_80×11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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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광_Nightswimming_디지털 프린트_50×6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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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수_The kid to blow the bubble gum_캔버스에 아크릴_130.3×162.2cm_2006


자라온 환경이 흙바닥이 아닌 아스팔트, 혹은 시멘트 바닥인 아이들. 그들을 둘러싼 풍경은 산과 강이 아닌 아파트와 고층빌딩. 그들의 부모는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가고 혼자 시간을 보낼 때가 많은 아이들. 이 아이들의 친구는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 속에서 창조된 무수히 많은 형태를 지닌 ‘나’들이다. 아스팔트 세대들에게 어떤 보편적 정의를 부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이미 분자화된 세계를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고 그 세계가 몸에 새겨져 있어 이들이 드러내는 면모들은 말 그대로 파편적이고 다종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에게 그러한 보편적 성격을 부여하고 무리 짓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 말로 부모와 형님 세대에게 남아 있는 근대적 습성이지 않을까? 그것 보다 여기서 눈여겨보고 싶은 것은 정형적으로 구획된 도시라는 주거형태의 틀 안에서 아스팔트 키드들이 그 틀을 자신의 한계, 혹은 넘어설 수 없는 울타리로 여기기보다 오히려 놀이터로 삼고 그 틀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면서 그것을 확장시켜 나가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이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도시는 결코 적대적 감정이 등사된 곳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는 천연환경인 아파트와 도시를 무대삼아 판타지를 생성하고 확장시킨다. 이들이 자신의 판타지를 확장하는 것은 곧 그들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하며 정형화 하려는 현실세계의 질서에서 비껴가 그 질서에 포획될 수 없는 세계를 새로이 구축하려는 시도로 보여 진다. 하지만 이들의 몸에 새겨진 도시적 감성은 상당히 몽환적이고 자기 암시적이며 심지어 강박적이기까지 하다. 확장시키지만 그 확장의 색채는 밝지 않다. 그것은 이들이 도시를 가지고 유희하지만 근대문명의 결과인 도시의 병폐를 잘 알고 있으며, 자신들에게 익숙한 환경이지만 이 환경이 가진 어두운 이면 또한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의 몸에 쌓인 오염된 물질이 모태를 통해 새로 태어난 아기의 몸으로 고스란히 옮겨져 오히려 부모 세대의 노폐물이 아기의 신체에 삼투되어 버린 것과 같다고나 할까. 따라서 이들의 작품에서 스며 나오는 것은 부모세대가 세워놓은 도시의 병적 징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스팥트 키드들을 병적 징후로 재단할 수 없다. 그것은 이들 작업의 결과물이 우리에게 주는 독특하고 기묘한 미감과 그 아래서 언 듯 드러나는 판타지의 전복적이면서 확장적인 성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적이면서도 독특하고, 전복적이면서도 확장적인 아스팔트 키드의 감성에 대한 주목은 지금 짚어볼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샘플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무명씨들의 대화
기획_최정희 / 참여작가_김효준_무명씨_박상희_장성아_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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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준_야경-신림동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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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씨_magic family_원형와이드패널_30×3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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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_orange cafe am10:26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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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아_건물군_시트지와 테이프_가변크기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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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주_1964년 어느 날 밤_두랄루민_50×20×200cm_2006


‘현대인의 고독’, ‘군중 속의 외로움’이란 도시문화의 등장 이래 수없이 언급되어 온 진부한 명제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 삶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소통의 부족과 끝없는 외로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요소가 되었다. 핸드폰, 메신저 등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들이 꾸준하게 발전하고 다양화되고 있음에도, 이러한 현상은 축소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줄어들고 소통이 어려워지는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계속되는 도시화로 사람들은 보다 많이 모이고 부딪히지만, 그러한 군중들 속에서의 개인은 더 외롭기만 하며 익명화된 하나의 부품으로 간주될 뿐이다. 보다 빠르고, 보다 풍족해진 현대 사회에서 오히려 부족함과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통방식의 다각화가 차라리 소통의 부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왜일까.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풍부함에 비해 그것이 껍데기일 뿐인 허무함이라는 것을 동시대 작가들은 어떻게 느끼고 표현하고 있는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세계의 소통 단절은 작가들의 작업에서 어떤 식으로 표출되고 있는가. ‘무명씨’라 지칭될 수 있는 익명화된 인간들의 평면적이고 표피적인 소통을 ‘무명씨들의 대화’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멀미
기획_박천남 / 참여작가_노진아_늑대너구리_도영준_이경아_장유빈_조동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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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아_R1007세포덩어리_인형설치_가변크기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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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너구리_개념_개념덩어리_가변설치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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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준_스티로폼 북극곰_스티로폼_500×200×40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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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아_flying traps_사진_50×5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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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빈_기대_캔버스에 아크릴, 유채_130.3×162.2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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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광_일미리이용원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과학의 시대에 들어,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예술과 예술작품의 새로운 제작/지각 가능성이 시작되었다. 그 오랜 예술작품의 종교적 가치가 빠르게 전시적 가치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 예술은 예술의 물신화된 자율성 개념, 예배적 가치 추구로부터 매력적으로 벗어나 사회, 정치, 오락적 기능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예술은 예술에 적극적인 사회적, 정치적 개입을 시도하며 예술의 집중적, 관조적, 침잠적 수용을 넘어 정신오락적 분산적 지각을 강조하면서 사소한 것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현실을 더 많이 취급하기 시작했으며 예술을 숭배적 가치가 아닌 역사적/개인적 증언가치로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근 고속, 초고속을 넘어 광속 등의 표현을 자주 접한다. 이런저런 광고 카피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현대는 느린 것 보다는 빠른 것을 강조하고 주문한다. 세상의 대부분도 최첨단 등을 선호하고 추종하며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현대를 살면서 이를 모른 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최첨단의 성능과 개념으로 무장한 세상의 조건들을 따라 잡기란 작가나 관객 모두에겐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회 속에서 사회의 변화 속도와는 거리를 두고 가는 것이 예술의 한 특성이기도 하다. ‘멀미’는 세상의 속도보다 내면의 속도에 귀 기울이며 강력하고도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이들이 개인적인 주술 차원에서 촉발시키고 있는 물리적, 심리적 지형 변화의 조건과 가능성, 한계 등을 체험하고자 한다. 이들 6명의 작가들은 세상과 예술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고, 그것들을 비틀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주위를 특유의 어법으로 너울거린다. 또한 예술의 물리적, 객관적 특징을 견지하면서도, 예술을 공간적으로 인간적으로 가까이 가져오려는 지성적 시도를 선보인다. 이들의 노력은 이 시대에 있어 다행인가, 불행인가?





일탈(deviation)-꿈꾸는 사물들
기획_이은주 / 참여작가_구성연_오진선_이길렬_이혜진_임선이_차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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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연_화분 시리즈_컬러 인화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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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선_아스팔트 연못-덕수궁_디지털 프린트_72×10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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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렬_Pick Up Ⅱ_수집한 오브제_가변크기_1999, 2005-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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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_Masterpiece_이미테이션된 상품조합, 캔버스, 유화 몰딩 액자틀_150×12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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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이_Shelter-Landscape_시멘트, 석고_가변크기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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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엽_EVE_나무와 혼합재료_가변설치_2000


보잘 것 없는 미물들, 방구석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소지품들, 길거리에서 늘상 마주치는 지루한 사물들은 바쁜 일상 속을 시계추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다람쥐 쳇바퀴같은 생활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에게 이 일상의 사물들은 여유를 주거나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빨리 제거해 버려야 할 귀찮은 대상일 수도 있다. ‘일탈(deviation)-꿈꾸는 사물들’에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물들에 집착하는 작가들이 사물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심속의 문화, 혹은 도시인들의 감성을 담아내는 작업을 보여준다. 오브제가 도입된 이후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다양한 형식의 오브제가 미술작품 속에 도입 혹은 응용되어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완성과 함께 미술사속에 기록되어 왔는데, 여기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최근 젊은 작가들이 집착하며 보여주고 있는 주변의 사소한 오브제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우리의 발길에 채이는, 물건으로서의 기능을 쇠하고 버려진 물건들이나, 모조된 공산품들, 늘상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는 자연물들과 도심 곳곳에서 보여지는 자재들, 혹은 길거리를 지나치다 마주치는 풍경들이다. 작가들은 이 일상의 사물들을 가져다가 조합하거나 깍아내는 사소한 손길들을 통해 그들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 작가들은 왜 이러한 사소한 일상의 물건들에 집착하고, 그것들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할까? 이 젊은 작가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담겨진 사소한 물건들에 대한 집착의 의미와 그것이 만들어내고 있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일까? 이 미물들은 현대 도시생활에 강요당하듯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하며, 작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은 이런 우리 모습에 대한 은유적 표현일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모방하거나 모방당하고, 혹은 쓸모없이 버려지는 듯 느껴질 수 있는 우리 자신들이 잠시 도심을 벗어나 - 완전한 이탈을 시도하지만, 결국 도시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 사소한 일탈을 꿈꾸는 혹은 여유있는 재치로 잠시나마 우리 삶의, 사고의 휴식처가 될 수 있는 공간으로의 작은 꿈을 꾸는, 여기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그런 작은 여유를 관람객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Narrative Speaking
기획_박파랑 / 참여작가_서윤희_홍인숙_노충현_권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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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희_기억의 흔적(Memory Traces) 03_종이에 혼합재료_50×5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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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숙_신끼에 가까운 이해심-엄마_먹지로 그리고 종이로 찍다_100×70cm_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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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충현_바닥없는 오후 Ⅱ_캔버스에 유채_90.9×116.7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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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_어린이는 나라의 보배_한지에 채색_55×73cm_2006


“자신의 사생활을 널리 알리리라....” 오늘날 젊은 세대들 사이에 블로그(blog)나 싸이(cy world)와 같은 개인 웹 사이트를 통한 개인사의 노출이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가운데, 이러한 세대적인 특성은 미술, 특히 회화의 영역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근래 젊은 작가들 작품의 상당부분에서 목격되고 있는 개인적인 신변잡기 및 일상에의 치중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만의 일상적 경험담과 추억들은 특유의 젊은 감성에 팝(pop) 혹은 키치(kitsch)적인 조형적 경향과 버무려지고 있는데, 타자에게는 별다른 호기심을 던져줄 리 만무한 소소한 그들의 개인사는 조형적인 미숙함까지 더해져 ‘그림일기’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 느낌이다. 거창한 담론이나 사회적 논의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판 모르는 누군가의 수다에 대책 없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싶지도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간의 젊은 작가들의 트렌드로서 개인사에 얽힌 사적인 얘기(personal narrative)에 대한 욕구를 간과할 수 없다면,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스토리 텔링의 나열을 넘어선, 회화적 내러티브에 대한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내러티브 스피킹(Narrative Speaking)'은 근래 지극히 개인적인 신변잡기 및 일상이 범람하는 가운데, 단순히 개인사의 나열이 아닌 회화적 서사 구조를 창조해나가는 젊은 작가들에 주목한다. ■ 서울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