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집적이 만든 부유하는 풍경

김미진(홍익대 교수, 기획&비평)

 

<shelter-성장의 한계>는 실제 선인장화분을 시멘트와 석고로 캐스팅해 만든 작업으로 임선이는 이 회색식물들을 도시의 폐허가 된 콘크리트 건물 안에 설치해 놓았다. 한쪽 벽은 부서져 외부의 풍경이 그대로 노출되고, 바깥의 생명력 있는 잡초와 빛은 공간에 개입되어 내부 풍경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회색도시공간이란 환경안의 선인장 화분들은 시간이 멈춰 있는 화석처럼 보인다. 이 화석 선인장화분은 작가자신이기도 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기도 하다. 작가의 감각과 감수성은 거대한 도시의 시스템 안에서 박제화 되고 있다. 외부의 자연이나 빛은 정물에 음영만 만들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외부 자연이 없다면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흑백의 수묵화나 사진처럼 보이는 초현실적 풍경이다.

<shelter>는 대피소, 은신처, 주거지로 해석되는데 삭막한 폐허를 거주지로 삼은 선인장들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선인장은 수분을 머금은 여린 내부와 척박한 외부환경을 견디기 위한 단단한 표피와 가시를 갖고 있다. 여림과 단단함, 성장과 멈춤, 내부와 외부와의 관계는 이후 작업에서 계속 탐구되는 소재다. 이 작품에서 싱싱한 잡초가 우거진 장소를 옆에 둔 폐허 안에서의 설치는 현실의 숨막히는 죽은 존재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 비해 전시장에서 보여주는 <shelter-landscape>는 싱징성과 조형성만이 남아 장소와 함께 보여주는 은유의 의미는 많이 상실되어 보인다.

2003년의 <모호한 경계>, <은폐된 풍경>은 내부에 흐르는 연약하고 섬세한 감각들이 만들어낸 작업이다. <모호한 경계>는 누런 종이봉투에 사군자의 이미지를 픽셀로 커팅하고 뒤에서 전등을 설치해 빛으로 이미지가 드러나게 한 것이고 <은폐된 풍경>은 초배지를 작은 구멍을 뚫어 표현한 작품이다. 누런 봉투 안에서 새어나오는 약한 불빛, 고급이미지를 흉내 낸 벽지나 장식그림은 우리시대의 소시민 집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실내풍경이다. 단순하고 빈약한 재질위에 수많은 타공기법으로 표현된 단순한 이미지 안에는 대부분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서민들의 애잔한 희노애락의 일상사가 녹아져 있다. 약한 존재라는 사회적 위치 안에서 개별적 휴머니즘의 순수함이 엿보이는 감각적 작업이다.

2006년도에 제작된 <한평의 흑해>은 한 평이라는 거주의 가장 최소단위 안에서 사이버 매체를 통해 외부의 풍경을 여행하는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그가 밤마다 경험하는 매체를 통해 익숙한 풍경은 지도의 등고선을 따라 제도된 지형들이 픽셀처럼 중첩된 풍경으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검은 색의 산수화처럼 정신의 세계를 갖고 재생산 되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2007년도 <붉은 눈으로 본 산수>로 이어지는데 붉은 색의 지형도를 오려 축적하여 만든 산수풍경으로 점점 더 탐닉하는 현대인들의 욕망에 의해 주체화되는 풍경이다.

한 장의 지도는 픽셀이 되어 집적되어 쌓여 풍경은 더욱 실제처럼 보인다. 픽셀의 은유는 사이버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와 인간이 들어 있다. 이 작품의 소재로 지도를 선택하는 방식은 아주 적절하였다. 종이지도는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지도를 보며 미지의 장소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던 기억에 대한 향수와 꿈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은유의 지도는 작가 작업실에서 한 장 한 장씩 쌓여 가면서 구조적으로 형태를 만들어 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도의 기호는 쌓여가며 상상된 지형들이 형태를 드러내고 실제 산을 등반한 것 보다 더 세밀한 형상을 만들어 내며 놀랍게 변형된 순수하고 정의되지 않은 예술적 존재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의미에서 빠져나온 유토피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산의 등고선 맨 위를 파면서 중첩해서 쌓아가는 지도들 안에는 산맥의 골짜기가 깊이 파이며 내부로 드러나고, 그 파낸 조각들을 쌓아가면 산맥들이 쌓여 실제 산처럼 형태를 드러낸다.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은 연결되어 있다. 작가내부에 존재하는 지형인 지도는 진짜세계에 대한 모방, 실제 여행에 대한 꿈, 재현의 사본 등의 은유이다. 그러나 이런 다의적 의미는 실제 여행하는 시간과도 맞먹는 작업행위의 시간성, 노력에 중첩되어 놀라운 또 다른 은유와 생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대인들의 공간 안에서 특히 정보매체로 접하게 되는 기호화된 풍경을 집적된 지도로 사유한다는 것은 작가만의 특이성을 갖는다. 작업과정에서 보이지 않은 내밀한 감각은 시간성과 가벼운 질료, 날카로운 자르기를 통해 바깥의 사유와 자신의 것이 절도 있게 합쳐져 외부와 주체 하나하나가 주름이 되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하나의 종이지도와 제도해 나가는 작가의 행위는 픽셀이 되어 쌓여 입체화되고 풍경자체가 생성된다. 이는 허구의 세계가 반복되는 현실을 통해 실제 현실과 구분이 없어지는 오늘의 세계를 보여준다. 들뢰즈가 말하는 현대 영화에서 왜곡된 회상, 거짓말, 꿈, 환각, 상상에 의한 거짓을 하는 서사인 ‘허구의 역능’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세상처럼 보인다. 작가가 제목으로 사용한 ‘붉은 눈’의 시선은 붉은 선이 중첩되어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띄는 풍경으로 실제는 아니지만 밤새 가상의 세계를 찾아 헤매거나 새로운 욕망의 기호를 생산해 내고 몰입하는 현대인들, 그들 안에서 살아가는 작가자신 그리고 진짜를 그 안에서 찾아내려는 작가적 정체성의 편집증적인 피곤함으로 해석된다. 이후 이 작품은 사진으로 다시 재 생산되어 <부조리한 풍경>의 전시로 연결된다.

여러 가지 은유가 중첩된 주름이 모여 만든 지도풍경은 사진으로서 이곳도 저곳도 아닌 <비장소>의 위치를 갖는다. 어느 공간에도 속하지 않는 그야 말로 처음 경험하는 부조리한 풍경인 것이다. 사진 작업은 여기, 저기도 아닌 은유와 실제의 중첩이 쌓여 만든 부유하는 이미지가 개념과 일치하는 예술작품이란 당위성을 갖게 한다. <모든 외부세상보다 가장 멀고, 그래서 내부 세상보다 가장 가깝다>라는 들뢰즈의 생성과 은유가 일치하는 풍부한 예술의 주름이 표현된 작품이다.

작가는 이 예술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짧은 작가와 만남 속에서 아직 자신이 추구하는 작업방향에 대해 확신이 없어 보이는 작가의 인상 탓이다.

작가가 날카로운 시대정신으로 사유하고 또 시간을 들여 만든 예술작품은 그 만큼 관객들에게도 체험된다. 임선이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평범한 일상(그의 말에 다르면 어정쩡한 정체성, 환경)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발견하여 사유와 노동의 집적을 통해 표현하고 그 결과 신체감각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앞으로의 작업 또한 기대되는 유망한 젊은 작가다. 최근 세계의 진실의 향해 계속 탐구하는 <trembling eyes> 시리즈 사진작업을 하고 있지만 이미 다른 작가들에게서 보여주었던 익숙한 표현이기에 언급하지 않겠다. 많은 실험을 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정착해 나가는 예술가이기에 이 과정에 대해 불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부조리한 풍경> 작품에서 보여주는 열정과 노력, 사유를 계속해서 해 나가면 어떨까라고 제안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진리를 향한 좋은 예술적 접근방식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다.

<좋은 은유는 혼돈으로부터 진리를 드러내는 은유이다. 은유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떨어진다 할 지라도 은유의 수수께끼는 우리에게 사물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좋은 은유의 규준은 진리의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모든 언어의 이상, 특별한 은유의 이상은 사물자체를 알게 하는 것이다. 언어가 우리를 본질적이고 고유한 진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면 더 좋은 것이다.> 여기서 언어를 예술로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