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구성/해체하는 차이

 

이선영(미술평론가)

 

자연과 인공물을 양적으로 계측하여 만들어진 지형도로부터 출발한 임선이의 작품은 과학 기술자들이 작성한 실증적인 자료를 참조하며, 이를 구현하는 방식 또한 합리적 노동의 과정이 상당 부분 차지하지만, 그 결과물은 자연이라는 원형을 모사하고 재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층만큼의 지도가 있는 집적의 방식은 건축 모형 제작 같은 기술에서도 발견되며, 더 나아가 3D 프린트 같은 기술의 원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선이가 사용하는 주재료가 컴퓨터를 포함한 기계로 쉽게 소화될 수 없는 종이라는 아나로그 재질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벌어지기 시작한다. 재료의 차이뿐 아니라, 임선이의 작품 자체가 차이와 반복의 어법을 구사한다. 그것은 다른 작가와의 차이를 낳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예술과 과학의 차이를 전제한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과학과 예술의 차이를 논한다. 그에 의하면 과학의 언어는 등가적 상징에 의해 지배된다.

여기서는 각 용어가 다른 용어들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반면 예술적 언어에서는 각 용어는 대체 불가능하며 단지 반복될 뿐이다. 반복은 법칙에 물음을 던진다. 집요한 반복은 과학의 일반적 법칙을 전복한다는 [차이와 반복]의 논리로 보자면, 임선이의 지형도 더미들은 과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예술적 실재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 ‘동일성은 차이 나는 것을 통해, 일자는 다자(多者)를 통해 자신을 언명’(들뢰즈)함을 보여준다. 산같이 가장 확고해 보이는 실체(동일성)는 ‘차이 짓는 가운데, 차이 나는 것으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을 통해 언명’(들뢰즈)된다. 이러한 연유로 임선이의 작품은 그 확고한 출발 및 과정과 다르게 매우 몽환적으로 나타난다. 올 초에 갤러리 잔다리에서 열린 ‘걸어가는 도시-흔들리는 풍경_SUSPECT’ 전의 작품들에는 얼음과 안개까지 가세하면서, 그 무한한 시간의 단면들은 서서히 흐르는 힘에 의해 삼켜졌다 뱉어졌다를 반복한다. 미세한 주름으로 나타나는 차이는 존재를 구성하면서 드러냄과 감춤의 유희 속에 잠겨있다.

시간의 지층들은 그것을 만들어내고 종국적으로는 사라지게 할 힘의 역학관계 속에 놓인다. 미세한 단면들은 인공의 구조들 역시 자연화 된다. 이전의 작품이 붉은 선의 계열을 보여준다면, 최근의 작품은 푸른 선의 계열이다. 푸른색 계열의 작품들은 마치 제 2의 빙하기가 닥쳐오려는 듯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거대한 자연의 시간주기 속에 문명을 놓자면 지금은 짧은 간빙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산 흔적은 있지만, 사람 자체는 보이지 않는 풍경은 종말론적 파국이 닥친 현재의 미래 같은 모습 같다. 그것은 불길한 예감처럼 서서히 다가온다. 파국은 원자 폭탄 같은 순간적 불벼락이 아니라, 북극의 빙하가 1mm 씩 녹듯, 해수면 온도가 0.5도 씩 올라가듯 서서히 진행되고 있지 않을까. 인공물이 다수의 구성요소로 포함된 풍경에는 모래성 같은 취약함이 깔려있다. 수 백 장의 지형도를 오려내어 수평으로 쌓아올린 구조는 매우 견고한 듯 하면서도 그렇지 않다.

그것들에는 무게와 밀도, 그리고 복잡한 굴곡 면으로 가시화된 부피감이 있지만, 종이와 종이 사이에 어떤 접착제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채 단순히 집적된 형태는 조그만 힘이 가해져도 흐트러지고 말 것이다. 오려진 종이면의 날렵한 선들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결을 살리려면 이곳저곳에서 두루 전시되기도 힘든 면도 있다. 할 수 있다면 하면 좋겠지만, 어쨌든 반복된 전시를 통해 너덜거리게 될 단면은 작가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차이를 향하는 반복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재현적인 반복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종이는 자연의 재료이기에 자연의 형태와 잘 어울리지만, 작가는 대여섯장이 한 단위로 쌓여진 수백장의 종이로 오래된 사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는다. 복잡 미묘하게 굴곡진 선들을 가능하게 하는 낱장의 종이들은 손이 배일 듯이 날카롭다. 작가는 오래된 사물을 겉으로 흉내 내기보다는 작업 과정에 쌓여있을 시간성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느긋한 산수풍경으로도 다가오는 임선이의 작품은 이러한 날카로움이 부드럽게 보일정도까지 양질전화가 일어났다는 증거이다.

뭔가 획기적인 고정 장치가 없다면, ‘영원히 변치 않을’ 예술작품으로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각 판들에는 숫자가 있으므로, 작가가 지시한 매뉴얼대로 누가 쌓아도 상관없는 개념미술이라고 우긴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임선이에게 전시는 여기에 있는 것을 저기에 가져다 놓는 재현적 활동이 아니라, 일회적인 나타남이라는 사건처럼 다가온다. 입체와 더불어 전시되는 사진은 작가가 구축한 섬세한 구조물의 미묘한 측면들을 담아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시간성은 내재한다. 112x150cm 또는 150x112cm 크기의 사진 작품 [극점] 시리즈는 이동의 느낌을 준다. 움직이는 안개에 들고나는 선으로 만들어진 면이 여러 각도에서 찍혀 있어, 작가의 관심이 공시적 구조보다는 생성과 소멸에 있음을 보여준다. 미분과 적분이 조형적으로 구현된 듯한 이 극한의 작업은 구조가 곧 해체임을 예시한다. 도미노 게임을 하는 사람처럼, 작가는 정해진 게임원칙대로 차근차근 과정을 밟지만, 게임의 절정은 무너짐이다. 그래야만 또 다른 게임이 시작될 수 있으니 말이다.

기발한 창안과 엄청난 노고에 의해 완성되는 즐거움을 누리는 예술의 더 큰 열락은 종결지음으로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 아닐까. 예술에는 그러한 시작의 신선함과 가벼움이 있으며, 이는 일상의 진부함 및 삶의 무거움과 다른 특징이다. 죽음에 이르는 열락이 없다면, 노동과 긴장의 축적은 고통에 불과하다. 생산 지상주의 사회의 합리적 이성은 이러한 고통을 미화하곤 한다. 사진과 입체작품 모두를 감싸고 있는 냉랭한 기운은 다가오고 있는 해체의 국면을 예기한다. 빈틈없이 단단히 조여져 있는 자연-인공구조물은 서서히 잠식되어 헐거워질 것이다. 운무에 감싸인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형상이 솟아있고, 또 한편에는 그 형태의 네가티브 형태가 아찔한 협곡을 이룬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기념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임선이의 작품은 말 그대로 깍아 지른 듯한 풍경이 연출된다. 산의 포지티브/네가티브 형태는 하나의 참조대상을 여러 가지 국면으로 분석한다. 네가티브 형태는 거대한 칼로 썰어놓은 양 조각내서 시점에 따라 다양한 국면을 관찰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낯선 풍경이 서울 한가운데 솟아오른 것이 남산이라는 점은 다소간 의외이다. [평평한 나뉨]으로 제목 붙여진 포지티브 형태에 비해, 네가티브 형태는 [긴장의 구축] 이라는 제목처럼 긴장감이 있다. 지면 위로 솟은 형태와 달리 아래의 것은 어두운 무의식의 영역을 떠올린다. 수면 위의 의식이 떠내어진 짝패는 무의식의 이질성보다는 의식자체의 이질성을 강조한다. 이면은 표면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또는 야생적인지를 보여준다. 관점을 달리하면 이성이야말로 괴물을 낳는다. 이에 비해 무의식은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임선이의 작품에서 네가티브 영역은 단절과 간극이 더욱 크다. 유토피아 풍의 산수 같은 풍경인데, 자세히 보면 실측 지도의 데이터대로 남산 주변의 집과 도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산기슭에 자리한 집들이 때로 산을 파먹은 것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처럼,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 살다보면 자연이 문명을 무조건 감싸 안고 있다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풍경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전의 인왕산 작업도 그렇고, 작가가 오리는 산들을 오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임선이가 즐겨 표현하는 풍경들이 좋고 멋지고 가보고 싶은 풍경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남산은 서울의 상징이자 인공적 구조물이 가장 많은 산이라는 점이 작가의 관심을 끌었다. 지형 뿐 아니라 지물을 포함함으로서, 작가는 인간과 무관한 억겁의 세월을 넘어서, 문명을 포함한 풍경으로 고양시켰다. 자연의 산물이었지만 자연에게 가장 큰 적대자가 된 인간들은 어디론가 다 쓸려나간 것같이 깨끗하다. 잔혹연극론을 주장한 아르토가 도시를 텅 비게하는 페스트를 찬양했듯이, 재현을 거부하는 치열한 예술에는 잔혹한 측면이 있다. 자연에 편재하는 물질과 힘이 저 바깥의 상황을 넘어서, 인간의 무대에도 똑같이 적용됨을 깨닫는 것은 비극성과 초연함을 동시에 야기한다. 임선이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무인지경의 유적지 같은 모습은 자연화 된 문명을 연상시킨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남산타워는 냉기를 뿜어내는 냉각장치에 의해 얼어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있는 인간의 기념비적인 구조물은 제목 [Silence]처럼 침묵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다. 금속 구조물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냉매는 산과 협곡을 잠식하고 있는 운무같은 역할을 한다. 친근한 자연과 문명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차가운 기운은 이미 갈라지고 있는 틈들을 더욱 벌려 나갈 것이다. 선을 따라 오려낸 평평한 면들을 어떤 접착제도 없이 그저 쌓아놓는 과정은 토대의 불안정성을 암시한다. 인간사회의 지배적 규칙은 자연의 법칙인양 다가오지만, 어느 순간에 잘려진 단면이나 빙결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오려진 하얀 종이 외곽을 이루는 붉거나 푸른 선은 주어진 단면의 어떤 한계나 경계가 가리킨다. 그러나 들뢰즈는 한계, 또는 경계가 사물을 하나의 법칙 아래 묶어두는 어떤 것도 사물을 끝마치거나 분리하는 어떤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거꾸로 그것은 사물이 자신을 펼치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쳐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극한의 단계까지 펼쳐지는 경계들을 보여주는 임선이의 작품에서 차이는 주름을 만든다.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들뢰즈). 순차적인 차이들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임선이의 지형도 집적물들은 부재와 허상으로서의 특징을 가지며, 안개와 얼음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강조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들뢰즈는 미분법의 해석을 둘러싼 물음이 ‘무한소들은 실재적인가 아니면 허구적인가’에 있다고 보았다. 잘게 잘린 구조의 집적을 보여주는 임선이의 작품에도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정교함의 극치를 달리는 그녀의 작업은 규칙의 취약함과 상대성을, 그리고 미세하고도 과격한 단절의 역사를 예시한다. 특히 인공구조물이 다수 포함된 문명의 지층들이 그러하다. 여기서는 모든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흔들리고 흐릿해진다. 그것은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작업에 몰입하는 순간 ‘노동과 집착에 대한 병’을 앓는다고 고백하는 작가가 인생의 크고 작은 시련을 겪으면서 도달한 직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