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후경(後景)

; 작품이 든든하게 기대고 설 수 있는

- 임선이 작가 워크숍과 비평적 멘토링

 

 

김종길 | 미술평론가

 

 

미학과 미술사방법론 그리고 미술비평이 수행하는 역할 중 하나는 작품의 ‘깊이’를 따지는 것이다. 따져서 묻고 물어서 밝힌 뒤, 작가/작품의 본질 또는 정신에 가 닿으려는 것이다. 눈앞에 현존하는 작품이 전경(前景)이라면, 그 작품의 보이지 않는 깊이가 후경(後景)이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후경을 밝혀서 작품의 탄생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한 작품의 미학적 본질/정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후경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보이는 전경이 ‘실재’로서 현실의 것이라면, 후경은 실재의 현실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작품은 한 작가의 사유의 총체일 수 있으므로 후경의 풍경을 그려나갈 때 반드시 현실적 풍경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나는 후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후경의 시간은 직선도 회귀를 반복하는 나선형도 아니다. 하나의 후경에는 몇 개의 직선과 곡선과 나선형이 몽타주하듯 펼쳐진다. 고구려벽화에 새겨져 있듯이 장면들은 불일치하고 나날이 연속되지 않으며, 사건들만 남아서 무질서의 파계를 이룬다. 일관성이나 통일성, 장면 구성의 치밀함, 사건의 기승전결 따위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삶은 일관되지 않고 삐죽 거리듯 튕겨 나가며, 예고 없이 불쑥거리는 사건들로 현실은 진창이다. 사람과 동물과 하늘과 나무와 새들의 시간이 분절되고 끊어져서 탱자나무 가지들이 엉기듯 엉기고 또 그 가지에서 자란 가시들처럼 웃자라서 날 섰다.”

 

1. 사람 임선이 vs 작가 임선이

나는 임선이 작가를 ‘안다’고 생각했다. ‘안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의 이름을 아는 것, 그의 작품을 아는 것, 아니 그와 내가 만났었다는 것,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서 최소한 그와 나는 서로 알고 있다는 것의 전제. 그래서 나는 ‘임선이’를 알고 있는 것일까? 보고 안 보고의 차이만큼 아는 것의 차이는 미세하지만 차이의 간극은 크다. 보았다고 해서 아는 것이라면 또한 그 무지의 깊이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아는 것의 이해는 보이는 것/곳 그래서 내가 보았던 것/곳의 앎의 과정이나 결과보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곳의 앎의 실체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임선이 작가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의 오해에는 그의 이미지를 기억해 둔 내 기억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렴풋하게 소문으로 알았던 학연 지연의 얼개일 수도 있을 터인데, 나는 분명히 그에 대해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미술계 내부에서 수차례 만났고 지나쳤고 흘러 다녔다. 이곳저곳에서 그의 작품들과 부딪혔고 그럴 때마다 그는 선명하게 ‘임선이’라는 작가로 내게 인식되었다.

내 안에 어렴풋이 인식되었고 다시 선명하게 각인된 그는 누구였을까? 내 안에 형성되어서 형상을 이룬 임선이의 실체는 무엇일까? 조각가 임선이? 아니다아니다, 그런 식의 논의라면 형편없다. 이 단순한 ‘앎’의 판단을 서두에 시작한 이유는 우리가 안다는 것의 심리적 형상이나 그 형상의 메타포를 따져보기 위해서다. 사람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형상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체각(體驗感覺)된 메타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메타포가 후경일 수 있다. 나는 임선이 작가에 대한 후경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큰 오류일지 모른다. 자, 이것이 내가 앞에서 전경과 후경을 이야기 한 이유다.

 

2. 관계의 메타포

한 사람의 실체는 한 사람의 은유다. 그 은유가 메타포다. 한 사람의 은유는 첫 인상에서 시작되지만 지속하지 않으면 쉽게 가라앉는다. 인연의 지속이야말로 관계의 메타포를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삶의 이치다. 수 년 동안 임선이 작가와 나는 느슨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의 메타포를 유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그 메타포의 후경에서 그의 작품들과 만났고 그의 작품들이 전하는 ‘임선이’라는 실체에 접근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임선이’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임선이 작가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왜냐고? 그것은 메타포이니까!

한 사람의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관계의 메타포’는 비평의 실체일 수 있다. 작품에 대한 낱낱의 기술하기를 통해 의미의 관계망들을 분석하고 따져서 메타포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 하나의 비평적 수행이라면, 다른 하나는 메타포의 실체 뒤에 은밀하게 감추어진/숨어 있는 거대한 상징을 밝히는 일이다. 우리는 그 두 가지의 비평적 수행을 통해서 한 작품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trembling eyes>의 화분은 관계의 메타포를 형성하는 하나의 은유다. 작가는 화분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진 작업을 시도했다. 그는 두 개의 위치에 각각 화분과 사진기를 설치한 뒤, 화분을 360도 회전시키며 사진을 박았다. 그렇게 촬영된 이미지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오버랩핑해서 상(象)의 겹이 드러나도록 했다. 동일위치에서 회전한 화분의 모습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처럼 희미한 잔상(殘像)으로 가득하다. 둥근 화분의 형상은 거의 변화가 없는데 꽃들만 요란하다.

상이 잡혀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화분이다. 그것은 360도를 돌려도 상이 크게 흩어지지 않는다. 화분은 둥근 대칭구조여서 상의 아웃라인이 미세하게 떨릴 뿐이다. 그는 플라스틱 화분을 쓰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투명한 유리화분이다. 그러니 물에 담긴 화초의 뿌리와 줄기, 꽃이 다 투명하다. 낱낱이 보여서 맨 몸의 꽃을 보는 듯하다. 그런 수십 개 장면들의 오버랩이니 화초의 중심이 강렬할 뿐 한 잎 두 잎의 주변들은 그저 흔적에 불과해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장면성이 찰나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각각의 장면성은 각각의 현존성이다. 그리고 그 현존성은 사진으로 기록된 순간의 현존이며 시간이다. 하나의 사진에는 하나의 현존과 시간이 남는 것이다. 그는 그 현존의 시간들을 쌓아 올려서 그 어느 것도 아니나 모든 것의 시간이며 현존인 총체로서의 ‘하나’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하나에서 시간의 시차와 현존의 시차를 경험한다. 시차는 ‘틈’의 생멸이다. ‘사이’의 생멸이다. 임선이는 시차의 틈/사이에서 명멸하는 생(生)의 순간들을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화초는 시차에 놓여 있기에 그 어느 것도 존재의 선명함을 부각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마치 틈/사이에 갇혀서 생멸의 순간을 보이는 흔적들과 다르지 않다. 그는 가끔 화분 옆에 주검의 실체들을 슬며시 밀어 넣어 이미지 잔상의 위태로움을 붙잡아 두기도 했다.

‘흔들리는 눈’의 후경에서 “시차/틈/사이/생멸/생의 순간/존재/흔적/잔상의 위태로움”과 같은 열쇠 말을 발견되듯이, 그는 이 작품의 연작들을 통해 ‘존재의 흔적과 위태로움’에 대해 말하고자 한 듯 보인다. 그가 오랫동안 보여 주었던 작품들과 비교되면서 다소 뜬금없이 보이기도 하는 이 사진작품들은 그러나 그가 후경의 풍경을 어떻게 그리면서 변화해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단서가 아닐까 한다. 슬쩍 그 단서의 실마리를 엿본다면, 장면의 관계성이라는 ‘층구조’를 통해 삶의 메타포를 미학화 하는 전략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3. 조각적 은유와 하나의 사건

그는 십 수 년 동안 사물과 풍경의 관계, 그리고 관계의 메타포를 밝히는 작품들을 제시해 왔다. 그런 작가적 행위는 작품을 보는 비평가의 안목과 유사하다. 그는 그가 보는 사물들의 관계망을 분석하고 따져서 사물에 깃들어 있거나 떠돌거나 배회하는 메타포의 실체를 조형의 형식으로 분석했다. 내 기억에 뚜렷이 각인된 <Transplantation>(2003)은 조각이 아니라 조각적 은유였다. 이식과 이주의 이 조각들은 작가의 내부의 추상이 소조의 방식으로 제작된 조각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디에나 있는 것들이고 하찮은 것들이다. 귀엽고 앙증맞아서 ‘이식과 이주’의 삶을 배회하며 애완식물로 존재하나 그 삶의 생멸은 단순하다. 그래서 하찮다. 그는 그 삶의 단순성에서 혹은 하찮은 이주의 식물성을 기념비화 하려는 듯 물성을 바꿨다. 이제는 어디에나 있어서 우리 자신도 벗어나지 못하는 시멘트 콘크리트 아파트처럼 그것들도 단단하게 생멸을 관념화 했다. 바로 거기에 조각적 은유의 메타포가 있다.

<그들만의 세상을 기념하며>는 떠도는 고양이(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그는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난지’)의 3기 입주 작가로 있었다. 주지하듯 난지는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의 침출수처리장을 리모델링한 공간으로 2006년 4월에 개관했다. 거대한 매립장이 수십 년을 거쳐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대 도시의 주택 밀집지역과 한강 사이에 위치한 난지와 하늘공원은 그래서 길 잃은 짐승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어느 날 작가의 작업실로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 들었다. 이상한 동거의 시작이었다. 그는 고양이를 내쫓지 않았고 들고나는 순간들조차 강제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삶이어서 동거의 조건 따위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었던 셈이다. 작가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작업실을 열어두거나 닫거나 했고 고양이는 그 순간들의 조건을 따랐다. 양육이나 보호관찰 따위로 고양이에게 접근했다면 고양이와의 낯선 동거는 지속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양이의 삶을 사유하기 시작했다. “떠돌거나 배회하는 메타포의 실체”에 관심을 가졌던 그이기에 고양의 삶이 가볍지 않았다. 그가 작성한 사유의 흔적은 다음과 같다

 

- 도시 뒷골목으로 밀려나 조용히 기생하며 숨은 그림인양 풍경을 이루고 생존

- 살아가기 만을 위해 길들여진 종과 사물화 된 자연을 보는 ‘어려운’ 눈

- 야전장의 위장 군인처럼 근육을 수축시키고 움츠리며 소리 내지 않고 눈에 띄지 않아야

- 소리 내지 않고 외마디 짧은 비명으로 생을 마감

- 오래되어 고착되고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어슬렁거리며 배회한다

- 그들에겐 슬퍼할 기뻐할 권리는 없다

- 그들의 습성은 오래되거나 시간이 묻어난 녹이 든 유물과도 같다

 

임선이는 ‘고양이’라는 메타포의 실체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선인장을 조각했듯이 소조의 방식으로 고양이를 형상화 했다. 나는 그의 고양이 조각에 대해서도 <Transplantation>과 정말이지 똑같이 비평하지 않을 수 없다. “귀엽고 앙증맞아서 ‘이식과 이주’의 삶을 배회하며 애완식물로 존재하나 그 삶의 생멸은 단순하다. 그래서 하찮다. 그는 그 삶의 단순성에서 혹은 하찮은 이주의 식물성을 기념비화 하려는 듯 물성을 바꿨다. 이제는 어디에나 있어서 우리 자신도 벗어나지 못하는 시멘트 콘크리트 아파트처럼 그것들도 단단하게 생멸을 관념화 했다. 바로 거기에 조각적 은유의 메타포가 있다.”

 

그가 식물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식물인식은 식물일까?

그는 작은 화분들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 ‘봄’의 인식이 그의 내부에서 일으켰던 메타포의 형상은?

그리고 그 형상의 후경에 똬리를 튼 상징의 실체는 무엇일까?

 

<Trifocal Sight>이후 그의 작품은 지속적이라는 생각이다. 이때 지속적이라는 말의 맥락은 초기의 작업 개념을 은연 중 차연(差延)시키면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십여 년 동안 그의 작품들은 형식의 차이를 발생시켰으나 그 내부를 관통하는 개념의 차이는 크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그가 늘 ‘안다’는 것의 이유를 되묻는 미학적 탐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한 장면은 하나의 사건이다. 다시 다른 한 장면도 하나의 사건이다. 두 장면은 동일한 대상을 취하나 다른 사건으로 이어진다. 만약 12컷의 사진이라면 12번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들은 다시 하나의 장면성으로 제시된다. 그는 초기의 시멘트 화분들처럼 사진 작업에서도 ‘관계의 메타포’를 사건화 하며 사물의/이미지의 실체를 따져 묻는다. 실체를 따져 물어서 ‘아름다운’ 사진 작품이 탄생했다. 자, 그렇다면 이 사진의 후경은 무엇으로 이뤄져 있을까?

 

시멘트 화분과 사진 화분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멘트 화분에서 보이는 후경은?

사진 화분에서 보이는 후경은?

 

 

오늘 우리는 후경의 상징계로 들어가는 ‘말싸움’의 한 판을 다투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