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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로서의 ‘작업’
고원석 (공간화랑 큐레이터)
임선이는 작가로서의 분명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화법이나 분위기와 같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은 아니다. 그 개성은 임선이가 자신의 실존적 삶과 유리되지 않고, 삶 속에서 경험한 여러 감정들이 밀도 높게 결합된 작품들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러 요소들은 그가 명확하게 정리된 개념적 프레임을 정교하게 구현하기보다 모호한 기대와 혼란, 어지러운 시행착오가 반복되는 일상의 불투명함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선이의 그러한 특징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특성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학부에 재학중이던 2000년, 공장미술제에서 그는 실내 벽면에 원래 존재했던 파이프라인 주변에 비슷한 파이프들을 연결, 배치하여 일종의 변형된 풍경을 구축하였다. 실재하는 풍경 속에 있음직한 어떤 오브제들을 의도적으로 변형시키거나 도치시켜, 원형과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관람자들이 대부분 작품인줄 모르고 지나쳤다는 그의 웃음 섞인 말은 그가 예전부터 자신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다른 요소들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할 줄 아는 작가였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2003년 두아트 갤러리에서 임선이는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다양한 종류의 작품군을 충실하게 준비한 그의 전시는 일부 젊은 작가들이 한 두 가지 아이디어를 반복 생산하거나 복제하여 구성한 개인전의 빈약함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 전시에서 선보였던 시멘트 선인장들은 날 것의 느낌이 나는 전시장의 시멘트 바닥과 조화를 이루며 전체 분위기를 주도했다. 전시장이라는 환경에 자극 없이 존재하는 어떤 오브제를 만들어 놓고, 그 오브제와 자연스럽게 합쳐진 새로운 풍경을 다시 만든 것이다. 오브제 자체는 인위적이거나 심지어 부정적인 느낌마저 들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경에 합일되어 원래 그렇게 존재했던 것처럼 믿게 만드는 어떤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지나쳐버리기 쉬운 일상적 재료의 속성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최소한의 스케일로 전체 공간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능력은 그가 지닌 특별한 작가적 재능이었음이 분명하다.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풍경에 개입하는 일련의 작업을 지속한다. 일상에 접하는 대부분의 풍경들이 의도적으로 미화된 것들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그는 어느날 공중파 TV방송의 전후의 애국가 화면에서 전형적인 풍경의 관념적 왜곡을 관조했다. 통상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자연 풍경들을 가공하고 채색하여 일종의 유토피아적 배경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들을 마치 실제로 체험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 폭력적인 행위의 결과는 어떤 기준과 관점이 부재한 상태로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의심 없이 믿어 버리는 현상이 그에게 매우 거슬리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왜곡에 대해 개입하는 ‘입장’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부정과 냉소, 혹은 찬성과 동화의 양 극단으로부터 모두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러한 태도에 대한 결과론적 비판이라기보다, 그러한 것들이 아름답다고 여겨지게 만드는 인식적 상황이다. 일련의 행위에 의한 결과로서의 풍경 보다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인식과 관점의 문제에 집중한 것이다.
최근 수년간 발표해온 ‘Trifocal Sight' 시리즈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작품으로 묘사한 인왕산은 서울에 중심에 존재하며, 누구에게나 친숙하게 여겨지는 풍경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왕산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으며, 일종의 관념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은 풍경이다. 어느날 주변을 지나다 우연히 인왕산의 형태를 관찰하게 된 임선이는 막연한 명칭으로만 인식했던 인왕산을 새롭게 재현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인왕산의 등고선이 프린트된 지도들을 축적하여 어떤 형태의 틀을 얻은 다음, 선을 따라 커팅하여 정교한 형태의 매스를 얻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태를 파내고 남은 공간이 만들어내는 네가티브적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실재의 인식과 재현을 위해 기호의 체계로 분석하고 구현한 등고선이라는 소재를 물질감을 갖는 매체로 활용하여 대상의 입체적 구현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세상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부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사물들에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의 시멘트 선인장은 남들 눈에 크게 거슬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도, 초록빛을 띠어야 할 본래의 모습을 위장하고 부스러지기 쉬운 건조한 상태로 풍경 속에 조용히 기생하는 것들이다. 패턴이 인쇄된 벽지 위의 자수 작업이나 장판지 위의 펀칭 작업도 비슷한 것들이다. 임선이는 그 거북살스러운 풍경에서 또래보다 늦은 진학 등 동료집단의 주류적 움직임에서 벗어나 혼자만 무언가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상황에 대한 자신의 감응보다는 환경을 관조하는 시선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어쩌면 그가 표현하는 시선은 일종의 착시일수도 있다. 그가 그 착시를 통해 자신을 은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명확한 규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 모호함이야말로 임선이의 실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기실 세상은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주체’의 시선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관심은 그가 구현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구현하는 임선이에게 집중된다. 우리는 임선이라는 사람이 작가로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 구현해내는 자신만의 세계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확고부동한 원칙과 기준들이 정교하게 들어맞아 예측이 가능한 환경들은 대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는 것은 번민과 방황을 반복하며, 양립불가능한 극점들을 넘나드는 불안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이 아닐까? 임선이와의 대화에서 혹시 그가 명확하게 정리된 관점을 확보한 작가로서 작품활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일종의 이상향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작업을 지속하는 자신에 대해 너무 준엄한 과제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삶에 존재하는, 비루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도 결국 그의 삶에 존재하는 어떤 ‘현상’이며, 크게 보아 그의 작업의 일부로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들일테니 말이다. 작가는 그 삶이 직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