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빛을 발하다가 조용히 꺼지더니, 끊어질 듯 다시 불이 들어온다. 오래된 샹들리에들이 아직 남아있는 호흡을 지속하듯,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임선이는 2019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의 개인전 《양자의 느린 시간(Slow time in Quantum)》에서 한때 중산층 가정의 실내를 장식하며 화려하고 찬란한 빛을 발했으나 이제는 유행이 지나 관심 밖에 놓여진 샹들리에들이 스러져가듯 깜박이는 장면을 연출한 <녹슨 말>(2019)을 발표했다.
이러한 작업은 임선이가 오랜 기간 천착해왔던 산수 연작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평면인 종이들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쌓아서 만드는 산수 연작이 종국에는 단일한 모뉴멘트(monument)로 완결되면서 매일의 반복적 노동을 통해 어떤 ‘상(像)’을 붙잡으려는 의지를 드러냈다면, 낡은 샹들리에가 마치 호흡하듯 켜졌다 꺼졌다 하는 이 새로운 설치작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실되어가는 것들을 흘러가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낡은 샹들리에들은 작가의 수작업으로 하나하나의 크리스탈 조각을 이어나가며 흡사 쓸모없게 된 물건들을 되살려내듯 공들여 만들어졌다. 작가의 수작업에 의해서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태어난 이 샹들리에들은 마치 주목받지 못한 무대 위에서 찬란하지는 않을지언정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는 주인공들처럼 보인다. 생명이 남아있지만 점차로 스러져가는 존재들의 호흡이 담겨져 있는 듯한 그 빛의 느린 점멸은 감추어진 곳에 있는 연약한 것들이 발하는 아름다움을 애잔하게 전해준다.
이러한 작업의 변화에는 작가가 몇 년간 작업의 휴지기와 함께 경험한 삶의 무게가 담겨있다. 임선이는 반복적으로 쌓아 올려 최고점에서 완결짓는 종전의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완성도 있는 종결 자체가 어려운 상태로 존재하는 주변적 세계를 오랜 시간 바라보는 시선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샹들리에의 크리스탈에 부분부분 부착된 단어들은 작가의 아버지가 실제로 남긴 메모에서 가져온 것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는 조명의 느린 호흡으로 인해 흡사 뜨문뜨문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인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치게 되는 이 말들은 누구에게도 건네지지 못한 채 되뇌어지는 독백과도 같다. 임선이는 이 작업을 통해서 젊은 시절 에너지가 많았던 시간을 거쳐서 느려져 가는 노인들의 시간을 다루고자 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인 변화에도 불과하고, 돌이켜보면 임선이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중요한 작업의 근간이 되어왔다. <Trembling eyes>(2010)나 <회향>(2013) 연작에서는 여러 개의 시점을 동시에 개입시켜서 정물을 촬영함으로써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축적된 상을 재현한 바 있으며, 산수 연작 역시 평면적인 층들을 하나씩 쌓아가는 노동을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시간성은 임선이의 작업에서 중요한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시간의 축적을 전제하면서 그 자체로 시간적인 공간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작인 <108개의 시선>(2019)에서도 임선이는 삼각형으로 된 만화경 36개를 이어붙여 5각형의 별모양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제목 그대로 108개의 시선을 제시했다. 이 만화경들에는 현실의 상이 투영되지만, 다른 각도의 시점에서 본 형상들이 서로를 반사하면서 셀 수 없이 다양한 상들이 맺히게 된다. 임선이는 이처럼 단일한 상으로 귀결될 수 없는 연속적 이미지를 통해서 시간의 흐름이 개입된 다층적인 시선을 제시한다. 이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단일 시선의 틀에서 벗어나, 실체와 관습적인 인식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한 실체를 붙잡고자 하는 의지는 임선이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작업 동기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지형도의 등고선 정보를 출력한 종이를 쌓아서 입체를 만든 산수연작은 단선적으로 정보화된 것들을 통한 인식의 한계치를 넘어서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자연을 수치화한 등고선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정보값을 물질로 전환하여 축적해가는 노동으로써 객관적 정보들 사이에 누락된 결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손으로 상을 더듬어가는 행위를 통해서 임선이는 정보체계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산수의 실체에 닿으려 한다.
‘극점’이라는 제목처럼, 매일의 노동을 통해 축적된 에너지는 가장 고결하게 순화되는 어떤 정점을 향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임선이가 도달하고자 하는 산의 실체는 먼 이상으로만 남는다. 인공적인 정보체계, 언어체계 안에 포섭될 수 없는 그 세계는 언제나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실제의 지리정보를 반영한 지형도처럼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임선이의 산수가 마치 전통적 동양화의 관념산수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임선이의 산수 연작은 전통적 산수화와는 달리, 자연이라는 실체가 인공적 장치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을 갖는 위치에 놓여짐으로써 이상화되어버린 현대의 상황을 투영하고 있다. 그 안에는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정보단위로 코드화된 사회 속에서 스스로의 자연성을 박제해버림으로써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상실감과 노스탤지어가 있다. 시멘트로 선인장을 만든 <Shelter>(2003)나 자연물 문양의 벽지를 재현한 <From island to island>(2005), 기계자수로 짜여진 식물문양의 천 위에 나비를 형상화한 이미지의 <머물다>(2008)와 같은 임선이의 초기 작업 역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임선이는 관습화된 언어나 규범적 시선에 의한 인식과 그것으로 포착 불가능한 실체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과정을 통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 있는 자기 위치를 부단하게 찾아왔다. 임선이는 자신의 산수 연작을 “부조리한 여행”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전통적 동양화에서 산수를 통해서 ‘와유(臥遊)’ 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임선이의 작업에서 도달 불가능함을 전제로 한 부단한 시간의 축적물을 보게 된다. 흡사 이상적인 관념산수처럼 보이면서도 매일의 일상적 노동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그의 산수 연작은 결국 현실과 이상의 간극 사이에서 살아가는 어떤 시간에 대한 모뉴멘트라고 할 수 있다.
임선이가 평면을 쌓아 완성된 3차원적 구조물을 사진으로 찍었던 것은 사진이 현실의 리얼리티와 이상 사이에 존재하는 지점을 가시화하는 효과적인 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극점>(2014) 연작에서 자신이 일일이 오리고 쌓아서 만든 산수를 마치 흡사 빙하기의 풍경이나 유토피아처럼 연출하여 사진으로 포착했다. 오랜 휴지기를 거친 후 발표한 최근의 <유토피아>(2019) 연작에서, 그는 인물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 변화를 보였다. 이 연작은 퇴역장교인 아버지, 80대 이발사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앞서 언급한 <녹슨 말> 연작과 마찬가지로 노인들의 시간에 대한 작업이다.
이 새로운 사진 작업들에서 임선이는 노인들이 처한 현실의 리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고 있지만, 낡은 철제통에 들어있는 퇴색한 아버지의 계급장이나 오래된 이발소 안 기구에 새겨진 ‘유토피아’라는 상표가 안겨주는 괴리감을 통해 한때 찬란했으나 이제는 흐릿해진 채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그들의 이상을 주지시킨다. 날렵하게 움직이지만 주름진 이발사의 손이나 TV 리모콘을 여기저기 돌리고 있는 아버지의 손은 묵직하게 쌓여있는 삶의 무게와 함께,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와는 다른 시간의 결로 축적된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유토피아’ 연작은 이상을 향해 가는 우리들의 여정이 위치한 현재적 상황에 대한 메타포가 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사회의 변화 궤도에서 한참 떨어진 채로 흘러가는, 많은 의미가 쌓여있지만 실상 주목하는 이 없는 노인들의 느려진 시간에 대한 오마주라 할 수 있다.
임선이가 다루는 ‘유토피아’는 결국 별처럼 멀리 있지만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이상적인 어떤 지점으로 향하는 여정을 상정한다. 앞서 언급했던 <108개의 시선>에서, 만화경들이 별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 구조물은 그 별이 실은 먼 곳이 아니라 현실 내부에 이미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그가 종이를 오리고 쌓는 부단한 매일의 노동을 통해서 매일 매일 더듬어가며 다가가려던 실체, 우리의 인식체계로 붙잡을 수 없기에 먼 이상일 수밖에 없었던 그 실체가 어쩌면 비루하게 여겨지는 지금 여기의 현실 안에 이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만화경 속 현실의 상들이 서로 반사하면서 만들어내는 그 이미지는 <녹슨 말>의 샹들리에처럼 느리고 비생산적이며 주변적인 삶의 시간에 숨겨진, 화려하지 않은 찬란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은주(독립기획자, 미술사가)